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국사의 후궁 제도 (문단 편집) == [[금나라]] 시대 == 금나라 초기엔 [[당나라]]의 후비 제도인 1후 4부인 9빈 27세부 81어처 제도를 수용했는데, 당나라의 4부인(귀비, 숙비, 덕비, 현비)에 원비(元妃)[* [[조선]]의 원비(元妃)는 조선 임금의 첫 왕후의 지칭이다.]를 더하여 황후 아래 1등 후궁의 작위에 올리고 신분·출신 등의 이유로 황후에 올리지 못한 원배(元配·初室)의 작위로 썼다. 이후 태자가 황위를 승계하고 태자비가 황후에 오르는 것이 정착되면서 원비 역시 평범한 1등 후궁의 작위로 정착된다. ||구분||품계||작호||정원|| ||부인||정1품||원비(元妃), 귀비(貴妃), 숙비(淑妃), 덕비(德妃), 현비(賢妃)||각 1인|| ||9빈||정2품||소의(昭儀), 소용(昭容), 소원(昭媛), 수의(修儀), 수용(修容), 수원(修媛), 충의(充儀), 충용(充容), 충원(充媛)||각 1인|| ||<|3>27세부||정3품||첩여(婕妤)||<|3>각 9인|| ||정4품||미인(美人)|| ||정5품||재인(才人)|| ||<|3>81어처||정6품||보림(寶林)||<|3>각 27인|| ||정7품||어녀(御女)|| ||정8품||채녀(采女)|| 4대 황제이자 폐황제인 금 해릉왕 때에 이르러 미인을 밝혔던 그의 탐욕 아래 12비(妃)로 대폭 증가하기도 했다. 8대 황제인 금 선종 때 이르러 후비 제도가 다시 정비되어 작위와 숫자를 대폭 축소했다. 이에 5부인이 귀비(貴妃)·진비(真妃)·숙비(淑妃)·여비(麗妃)·유비(柔妃)로 교체되었고[* 금 선종 역시 원비(元妃)를 두었지만 즉위 원년(1213년)과 2년(1214년)에 이뤄진 것이다. 금 선종이 익왕으로 있던 시절 한꺼번에 3명의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는데 그 중 2명이 왕씨 자매이며, 나머지 1명이 방씨(훗날 진비)이다. 1213년에 황제로 즉위한 선종은 왕씨 자매 중 동생을 일단 원비(元妃)로 삼았다가 다음 해 정식 황후(인경황후)로 봉작했고, 이때 숙비로 있던 언니 왕씨를 원비로 올렸다. 훗날 이 원비 왕씨(언니)의 아들(1198년 生)이 황위에 올라 금 애종이 되어 원비 왕씨 역시 사후에 황후로 추존돼 명혜황후가 된다. 후비 작위의 재정비 후 원비 왕씨를 귀비로 개칭한 기록은 없다.], 9빈은 종전의 것을 그대로 두었으나 첩여(婕妤)를 추가하고, 정3품에 여인(麗人)과 재인(才人), 정4품에 순의(順儀)·숙화(淑華)·숙의(淑儀)를 뒀다.[* 금 선종은 후궁의 작위로 원비(인경황후의 첫 봉작, 명혜황후의 2번째 봉작), 숙비(명혜황후의 첫 봉작), 진비(방씨), 여비(사씨)를 썼고, 사실 상 금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금 애종은 황후 1인 외 가까이 한 궁인이 있었으나 정식 후궁으로 봉작하지 않았다. 이에 실제로 이 제도는 실현되지 못했다.] 그 아래는 여관(女官)으로 삼았다. ||구분||품계||작호|| ||5부인|| ||귀비(貴妃)·진비(真妃)·숙비(淑妃)·여비(麗妃)·유비(柔妃)|| ||빈||정2품||소의(昭儀), 소용(昭容), 소원(昭媛), 수의(修儀), 수용(修容), 수원(修媛), 충의(充儀), 충용(充容), 충원(充媛), 첩여(婕妤)|| || ||정3품||여인(麗人), 재인(才人)|| || ||정4품||순의(順儀)·숙화(淑華)·숙의(淑儀)|| || || ||여관(女官)||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